[문예 마당]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
언젠가 내가 아침 산책길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슴은 숲속에서 기다리다 그냥 돌아가겠지 아무 말 없이 슬픈 눈망울로 사람이 지나가면 토끼들은 반갑게 뛰어나오지 그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나를 알아보았지 내가 ‘토끼들의 이사’라는 시를 써 바쳤으니까 초여름 트레일에는 오디가 까맣게 익어가지 팔을 뻗치면 가지는 나에게 다가왔지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상심해 일찍 땅바닥으로 떨어지겠지 지난 세월 산책로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지 토끼, 사슴, 새들과 이야기를 나눈 영원한 우리들의 땅이었지 내가 안 보이면 바람은 울고 지나가겠지 구름은 슬퍼서 눈물을 뿌리겠지 토끼는 숲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사슴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겠지 텅 빈 산책로로 변하겠지 최복림 / 시인문예 마당 토끼 사슴 초여름 트레일 아침 산책길